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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홍철 당선자, "대전의 자존심 지켰다"

위대한 대전시민의 시대 활짝 열어 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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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 기자
기사입력 2010-06-02


염홍철 대전광역시장 당선자는 2일, 당선소감을 통해 자신을 선택해주시고 성원해 주신 시민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며, 이번 시장선거는 "저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위대한 대전시민 모두의 승리"이며, “자유선진당과 함께 오로지 세종시 원안을 관철시키고, 대전의 자존심을 되찾아야 한다는 지상명령”이라며, 승리의 소감을 밝혔다.

 염 당선자는 저는 4년전 선거에 낙선한 후 많은 어려움과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며 그간의 소회를 밝히고, 그러나 자신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친구같은 시민들이 계셨기에 다시 일어서, 오늘 이와같은 영광을 안게 되었다며, 승리의 영광을 시민들에게 돌렸다.

 오직 대전발전을 위해 저의 피와 땀과 눈물을 쏟겠으며, 그 길만이 시민여러분의 성원에 보답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무능과 독선이 아닌, 경륜과 능력을 바탕으로 대전에 희망을 되찾고, 세종시 원안관철로 대전시민의 자존심을 되찾고, 새로운 경제성장 동력을 만들어 내어 대전을 한국의 중심도시로 확 키우 겠다고 밝혔다.

 또한 이제는 좌절과 실패가 아니라 희망과 도약, 이 모든 것을 화합과 소통속에서 시민여러분과 함께 이루어 가겠으며, 위대한 대전시민의 시대를 활짝 반드시 열어 가겠다고 다짐했다. 

한편 염당선자는 방송 3사 예측결과 발표에서 염홍철 48,4%, 박성효후보 28,2% 앞서자 염후보를 지지자등을 염후보를 연호하고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

  <염홍철 당선자 프로필>

 1944년 충남 논산 ,논산 채운초, 강경중, 대전공고, 경희대, 중앙대 대학원
경남대 교수 및 북학대학원장,대통령 정무비서관,국립 한밭대학교 총장,중소기업특별위원장 (장관급), 대전광역시장

[염홍철 당선자가 걸어온 길]= 제공 염홍철

 문학인을 꿈꾸던 충청도 시골 소년 염홍철 당선자는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논산에서 마치고 고등학교 진학을 결정할 때 저는 좀 더 많은 것을 경험하며 공부하고 싶어 대전으로 진학을 결정했습니다. 

 가정 형편상 대학진학은 힘들었고 기술을 배워 취직을 하자는 생각에 대전공업고등학교를 선택하여 입학하였습니다. 고등학교에 들어 전교 학생회장과 jrc 대전지구 연합회장을 맡아 폭넓은 봉사활동과 교우관계를 유지하며 다양한 경험을 했었습니다. 

  특히 당시 대전시내 고등학교에서 활동력이 있는 학생들로 한다발회라는 모임을 만들었고 오늘날까지 이 모임은 끈끈한 정과 신의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대전공고 3학년시절 rcy충남학생협의회 회장이였던 저는 rcy총회에 참석, 충남지역의 일부 학교에서 행해지던 '은사의 날'(5월 24일)을 전국 행사로 열자고 제안을 했고 rcy총회에서 만장일치로 받아들여져 이듬해부터 전국 각급 학교에서 '은사의 날'행사를 열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1965년에 명칭은 '스승의 날'로, 기념일은 5월 15일로 각각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어 지금도 5월이 되면 남다른 기분에 젖어듭니다. 

학문적 탐구심이 강했던 청년기에는 공업고등학교를 다녔지만 기계만지는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아 취업보다는 대학진학을 결심하게 됐고 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특차생으로 입학하였습니다. 

  대학입학 후 제 인생에 큰 전기를 가져다주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일국교 정상화회담을 반대하는 학생시위, 6ㆍ3사태였습니다. 

 제가 학생시위에 적극 참여하게 된 것은 굴욕외교라는 측면과 함께 시위학생에게 냉차를 건넨 노점 할머니를 폭행한 경찰에 관한 동아일보 기사를 보고 정부의 부도덕성에 분노와 울분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한일 국교정상화반대 시위 참여가 문제가 되어 저는 대학 재학 중에 군에 입대하게 되었고 백마부대 일원으로 월남전에 참전하게 됩니다.

  제대 후 대학에 복학해서는 사회인으로 출발하기에 앞선 준비단계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 당시 많은 논문을 썼고 또 각종 대회에서 입상도 하며 학문의 폭을 넓혔습니다. 

주목받는 정치학자, 인기 있는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염 당선자는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학문을 향한 집념과 열정은 계속 되었습니다. 

  연세대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석사, 중앙대 대학원에서 정치학박사를 취득했고, 이화여대, 성균관대, 경희대 강사를 거쳐 남들보다 젊은 나이에 경남대학교 교수로 임용됐습니다. 

 또한 교수 재직시 미국 콜럼비아 대학 교환교수로 유학, 학문의 영역을 넓히는데 전념했습니다.

  특히 저는 그 당시 학계의 관심사였던 선진국과 후진국의 정치ㆍ경제발전 이론인 '종속이론'을 집중 연구하여 '제3세계와 종속이론'이라는 책을 저술했어요. 

 당시 이 책은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80년대 초 대학생들이 많이 읽는 책 중 하나가 됐습니다. 

학자로서 쌓아온 이론을 토대로 국가발전을 위해 봉사코자 공무원으로 인생의 길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대통령 정무비서관으로 첫 공직의 길로 들어선 후 주로 정치기획, 남북관계, 여성문제, 당정협조 등의 분야에서 일을 담당했습니다. 

 남북고위급회담 예비회담 대표가 되어 까다롭기로 소문난 북한 대표들과 협상을 벌였고 국제 의원연맹회의 참석차 평양을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5년간의 중앙행정을 통해 얻어진 경험과 역량은 자연스레 우리지역 대전사랑으로 이어졌습니다. 1993년 관선시장으로 임명받아 대전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마지막 관선 대전시장으로 재직하는 2년이라는 짧다면 짧은 기간동안 대전발전을 위해 많은 일을 했습니다.

  국가적 대사인 대전 엑스포를 성공적으로 치르면서 ‘엑스포 시장’으로 국내외에 널리 알려졌고 정부대전청사를 기공했으며 제75회 전국체전을 성공적으로 개최하였습니다.

 특히 대전의 세계화를 핵심으로 한 ‘21세기 대전 발전 구상’을 확정하는 등 역대 대전시장 중 가장 열정적으로 일한 시장으로 평가받을 정도로 열심히 뛰었던 2년이었습니다. 

  대전광역시장을 역임하고선 최고의 경영능력이 요구되는 한국공항공단이사장으로 발탁되었습니다. 

 영종도 인천국제공항 계획을 수립해 국제적 허브공항을 만들었으며 중부권의 발전과 세계화를 위해 청주국제공항을 완공하는 등 한국공항의 세계화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특히 공항공단이사장 시절에는 국내 최초로 사원 공채 시 여성인력을 20% 이상 선발하는 여성 할당제를 도입함으로써 여성의 사회참여 폭을 넓히는데 기여했습니다. 

 한국공항공단이사장을 마친 후 저는 항상 꿈꾸어 오던 대전발전의 뜻을 펼치기 위해 대전으로 다시 돌아 왔습니다.

  이 시기 한밭대 총장으로 2년간 재임하면서 교명변경과 함께 대학 발전의 의지를 결집한 결과 한밭대를 중부권 최고의 명문 국립대학으로 발전시켰습니다.

  한밭대가 최근 국립대학 종합평가에서 2년연속 우수대학으로 선정되어 수 십억 원의 재정지원을 받아 냈고, 전국 산업대학 특성화 평가에서도 1위를 차지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입니다. 

명예로운 국립대 총장직을 마친 저는 2002년 대전시장에 도전하여 시민들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저는 관선 시장에 이은 민선3기 대전시장으로서 대전이 ‘한국의 신중심도시’로 뻗어나갈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데 역점을 두었습니다. 

  임기 4년간 단 몇일도 개인적 시간을 쓴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혼신의 노력을 다한 것은 ‘충청권 행정중심복합도시 특별법’ 관철과 ‘대덕연구개발특구’ 지정이었습니다.

  한나라당과 수도권의 조직적인 반대움직임에도 불구하고 국가균형발전의 상징적 국책사업인 행복도시 건설을 위해 대전, 충남, 충북 3개 광역단체와 지역민들이 하나가 되어 이룬 쾌거였습니다.

  또 타시도와 정치권의 끊임없는 분산지정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유일의 대덕연구개발 특구를 지정케 함으로써 명실상부한 국가적 경제성장 기지로 육성하는데 초석을 다진것도 너무나 값진 일이었습니다. 

  이밖에도 대전도시철도 1호선의 개통과 민ㆍ관자율참여형 복지네트워크인 복지만두레, 그리고 시내버스 준공영제, 3대하천 생태조성사업, 대전 전역의 공원화사업 등도 시민들과의 공감과 공무원들의 헌신적인 노력에 힘입어 이룬 보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때는 시민과 연애하는 마음으로 앞만 보고 달렸던 보람과 결실의 시간들이었습니다. 

2006년 5월 31일 대전시장 선거에 대해, 혹자들은 '박근혜 칼바람‘과 병상에서의'대전은요?'란 발언 한마디로 인해 염홍철이 낙선했다고들 말합니다.

  어이없게도 박근혜 대표와의 싸움이 되어버린 이상한 선거에서 상대정당 및 후보진영의 집중포화에도 흔들림 없던 지지율이 막판 '중구 으능정이 거리'(박대표가 퇴원 직후 방문한 첫 유세지)에서 근소한 차이지만 역전되었으니 말입니다.

  “한나라당이 대전과 염홍철을 버린 것인데… 선거공보물에 까지『충청권 행복도시 건설은 사실상의 행정수도이전』이라며 이를 저지하겠다고 공약한 김문수 경기지사후보는 당선되고, 나는 끝내 시민들에게 버림받는단 말인가!…' 

  속으로 피눈물을 쏟아내며 그 참담함과 억울함에 잠 못 이루는 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제 믿음 안에서의 깊은 성찰과,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저와 이웃하는 친구 같은 시민들과의 만남 속에서 선거패배의 근본 원인이 저의 부족함과 그로 인해 시민의 마음을 얻는데 실패한 결과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시민들께서 저에게 다시 일어설 용기를 주셨기에 저는 다시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난 3년여간 인간과 자연, 그리고 영혼에 대해 시(詩)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빌려 시민과 소통하고, 저와 뜻을 함께하는 학자들과 함께「미래도시공동체연구원」을 설립하여 대전의 미래에 보탬이 되는 연구 활동에 몰두할 수 있었음은 즐겁고 행복한 일이 었습니다.

  아울러 대전발전의 역사적 전환점이 될 수 있는 행복도시를 위해 2005년 3월 8일『신행정수도 건설에 반대하는 정당에 더 이상 남아있을 수 없다』며 정치적 위험을 무릅쓰고 한나라당을 탈당했던 그 때의 결단이 지금도 옳았다고 판단하며, 그런 상황이 다시 온다면 역시 주저하지 않을 것이란 신념에 변함이 없습니다.

  행복도시로 가는 길이 여전히 가시밭길이지만, 좌절을 넘어 대전과 상생발전하는 세종시 원안을 관철시키고 대전을 확실히 키우는데 저의 땀과 피와 눈물을 쏟을 것을 다시한번 다짐합니다. 

대전시장 퇴임 후 그간 자주 만나지 못했던 친구와 지인들도 만나고, 봉사활동에도 참가를 했습니다. 특히 독서와 집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러던 중 2006년 9월 청와대로부터 장관급인 중소기업특별위원회 위원장에 저를 내정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고, 그로부터 며칠 후 제7대 위원장으로 취임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중소기업은 전체 사업체 수의 99%, 고용인력의 88%를 정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국가경제에서 비중과 역할이 매우 크고 중요한 중소기업을 위해 새로운 정책이나 아이디어를 내놓기보다 중소기업이 직면한 어려움을 파악하고, 정책의 시행착오를 줄여 나감으로써 중소기업이 경영하기 좋은 여건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많은 중소기업을 방문해 경영주와 근로자가 겪고 있는 어려움과 정부에 바라는 내용에 귀 기울였습니다. 일주일에 한번 이상은 기업체를 찾거나 간담회를 통해 중소기업인들과 많은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중소기업인들 애로사항 해결을 위해 관련 부처와 협의를 했고 여러 성과도 있었습니다. 특히 대전시 중소기업과 재래시장을 자주 찾아 활성화 방안을 모색하고 행ㆍ재정적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관계기관에 협조해 줄 것을 여러 차례 요청하였습니다. 

  2007년 11월 퇴임할 때까지 발로 뛰면서 중소기업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중소기업특별위원회 위원장을 하면서 배우고 느낀 점을 바탕으로 대전시 중소기업이 발전하고 성장하는데 도움을 주고 싶은 것이 제 바람입니다. 

  앞에서 말한 저의 삶을 함축시켜 표현하자면 ‘소수파(minority)인생’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골출신(논산 채운초, 강경중 졸업)으로 고등학교(대전공고)와 대학 내내 같은 지역 출신이 적어 늘 소수에 속했고, 교수시절 역시 동료교수에 비해 그럴듯한 배경을 갖지 못한 점 때문에 외로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중앙공직자 시절에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소수파적 인생을 뛰어넘었고, 그럴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끊임없는 노력과 자기계발 그리고 긍정적인 사고’였지요.

 저는 대학교수시절부터 새벽 5시면 어김없이 하루를 시작해왔습니다. 교수때 다른 사람보다 더 일찍 출근해 더 늦게 퇴근했어요. 물론 방학도 없이 몇배 더 공부하고 논문을 썼습니다. 

 중앙공직자 시절이나 관선 대전시장, 한국공항공단 이사장, 국립 한밭대 총장, 민선3기 시장, 중소기업특별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아서도 “나는 열심히 일을 해야만 생존하는 사람”이라는 일념으로 뛰었어요.

  또 한가지 제가 입버릇처럼 되뇌는 ‘나눔과 섬김’의 자세 역시 오늘의 저를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달리게 하는 또 다른 원천입니다.

  앞으로도 저는 이런 삶의 자세를 견지하며, 언제나 낮은 자세로 최선을 다해 나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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